로마자 표기법은 왜 부산을 Busan으로 적을까요?

수업 시간에 부산을 로마자로 적어 보라고 하면 Busan과 Pusan이 함께 나옵니다. 오래된 지도에서 Pusan을 본 학생은 Busan이 새로 생긴 이름이냐고 묻기도 하지요. 지명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우리말을 로마자로 옮기는 기준이 바뀐 것입니다.
로마자 표기법은 한글을 영어로 번역하는 규칙이 아닙니다. ‘부산’이라는 우리말을 로마자로 읽고 적을 수 있게 하는 약속입니다. 왜 B를 쓰는지부터 알면, 다른 낯선 표기도 훨씬 수월하게 읽힙니다.
부산의 첫 글자는 왜 P에서 B로 바뀌었을까요?
현재 쓰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은 2000년 7월 7일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전 규정은 매큔·라이샤워 방식의 영향을 받아 부산을 Pusan으로, 대구를 Taegu로 적었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영문 자료에는 지금과 다른 표기가 남아 있습니다. 당시 표기를 오늘의 기준으로만 재단할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개정 뒤에는 단어 첫머리의 ‘ㅂ’을 b, ‘ㄷ’을 d로 적어 Busan, Daegu가 되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ㄱ’은 g, ‘ㅈ’은 j를 씁니다. 국립국어원의 현행 규정에서 부산은 Busan, 대구는 Daegu, 제주도는 Jeju-do입니다. 우리말에서 ‘ㅂ’과 ‘ㅍ’은 다른 소리이므로, 로마자에서도 ㅂ의 b와 ㅍ의 p를 구별해 주는 셈이지요.
그렇다고 B를 영어 단어의 b와 똑같이 발음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로마자 표기는 영어 철자 시험이 아닙니다. 우리말의 소리와 구별을 제한된 글자로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부산은 왜 P가 아니지?’ 싶을 때는 글자가 바뀐 연도와 ㅂ·ㅍ의 구별을 함께 떠올리면 됩니다.
‘어’를 eo로 적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학생들이 가장 낯설어하는 표기는 ㅓ의 eo와 ㅡ의 eu입니다. 서울은 Seoul, 한글은 Hangeul이라고 쓰지요. 영어 단어를 읽듯이 eo와 eu를 한 덩어리로 소리 내려고 하면 오히려 헷갈립니다. 여기서 두 글자는 각각 우리말 모음 하나를 나타냅니다.
예전 방식에서는 ㅓ와 ㅡ를 나타내려고 로마자 위에 작은 표시를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글자는 보통 자판에서 바로 입력하기 어렵고, 표지판이나 전산 자료에도 일관되게 쓰기 불편했습니다. 2000년 개정 때 eo와 eu를 택한 배경에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현행 규정의 기본 원칙에도 로마자 이외의 부호는 되도록 쓰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음을 몇 개만 나란히 놓아 보면 감이 잡힙니다. ㅏ는 a, ㅗ는 o, ㅜ는 u입니다. ㅓ는 eo, ㅡ는 eu이고, ㅐ는 ae, ㅔ는 e입니다. ‘서울’을 Soul처럼 적으면 뜻밖에 영어 단어와 같아질 뿐 아니라 ㅓ를 나타낼 자리도 사라집니다. Seoul의 eo에는 그런 구별이 담겨 있습니다.
한글 글자보다 발음을 먼저 보는 까닭은 뭘까요?
로마자 표기법의 첫 원칙은 표준 발음에 따라 적는 것입니다. 외국인이 한글을 모르더라도 지명이나 말을 읽는 데 도움을 주려는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글을 한 글자씩 기계적으로 바꾸면 실제 표기와 어긋나는 일이 생깁니다.
‘종로’를 소리 내 보세요. [종노]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Jongro가 아니라 Jongno로 적습니다. ‘신라’도 [실라]라고 읽으므로 Sinra가 아니라 Silla입니다. ‘백마’는 [뱅마]가 되어 Baengma로 적고요. 한글 철자를 잘못 본 것이 아닙니다. 이어 읽을 때 달라진 소리를 반영한 결과입니다.
‘같이’는 [가치]라고 읽어 gachi로 적습니다. ‘해돋이’도 [해도지]라는 발음을 따라 haedoji가 됩니다. 이쯤 되면 로마자 표기를 만들 때 먼저 말을 입으로 읽어 보는 일이 왜 필요한지 느껴집니다.
다만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 말에도 범위가 있습니다. 된소리되기는 로마자 표기에 반영하지 않습니다. ‘압구정’은 실제 발음에서 ‘정’이 된소리에 가까워져도 Apg ujeong처럼 띄어 쓰거나 Apg u jjeong처럼 적지 않고 Apgujeong으로 씁니다. 이런 예외까지 함께 알아야 ‘발음대로’라는 원칙을 지나치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김치는 gimchi일까요, kimchi일까요?
규정의 자음 대응만 따르면 ‘김치’는 gimchi입니다. 그런데 음식 이름으로 널리 쓰여 온 kimchi도 익숙하지요. 국립국어원은 이 말에 gimchi와 kimchi를 모두 인정합니다. 규칙으로 만든 표기와 오래 굳어진 표기가 함께 쓰이는 사례입니다.
사람 이름에는 또 다른 사정이 있습니다. ‘김’의 첫소리를 규정에 따라 옮기면 Gim이지만, Kim이라는 성 표기도 오래 써 왔습니다. 현행 규정은 인명 등에 그동안 써 온 표기를 쓸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이름을 보고 규정표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틀렸다고 단정할 일은 아닙니다. 여권이나 학위증처럼 이미 쓰는 이름이라면 그 사람의 실제 표기를 확인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지명에서는 공공 표기의 통일이 특히 중요합니다. 한 장소가 지도마다 다른 이름으로 보이면 길을 찾는 사람은 같은 곳인지부터 확인해야 하니까요. 반면 이름이나 널리 알려진 문화어에는 오랜 사용의 무게가 있습니다. 로마자 표기법을 읽을 때 규정과 관용을 함께 보는 이유입니다.
낯선 로마자 표기를 만날 때 저는 세 가지를 차례로 떠올립니다. 언제 적힌 자료인지, 한글을 실제로 어떻게 읽는지, 오래 써 온 고유 이름인지입니다. 부산의 B 하나에도 소리의 구별과 표기법의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사연을 알고 나면 로마자 글자가 외울 목록보다는 우리말을 읽어 주는 약속으로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