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력은 왜 성적보다 먼저 흔들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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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력은 왜 성적보다 먼저 흔들릴까요?

얼마 전 중학생 아이가 글을 읽다가 “선명하다”는 말에서 멈췄습니다. 글자는 다 읽었는데 뜻이 머릿속에 잡히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옆에 있던 친구는 “밝다는 뜻 아니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말만으로는 문장을 밀고 나갈 힘이 부족합니다. 선명한 기억, 선명한 색, 선명한 주장에 들어 있는 느낌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휘력은 단어를 많이 아는 능력으로만 보이지만, 실제로는 문장 속에서 뜻의 결을 잡아내는 힘에 가깝습니다. 저는 16년 동안 국어를 가르치며 이 차이를 자주 봤습니다. 단어 뜻을 외운 학생은 시험 직전에는 잘 맞힙니다. 그런데 글이 길어지고 문맥이 복잡해지면 금세 흔들립니다. 반대로 말의 뿌리와 쓰임을 아는 학생은 모르는 단어를 만나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휘력은 단어장보다 문맥에서 자랍니다

단어장을 펼쳐 놓고 하루에 30개씩 외우는 방식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완화’라는 말을 ‘누그러뜨림’이라고 외웠다고 해도, 물가 상승 완화, 통증 완화, 규제 완화가 모두 같은 얼굴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세 표현에서 공통으로 남는 느낌은 ‘강한 상태를 덜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느낌을 잡아야 다른 문장에서도 단어가 살아납니다.

어휘가 약한 학생은 보통 모르는 단어 하나에서 멈춥니다. 그런데 실제 독해에서는 모르는 단어가 1개 나와도 앞뒤 문장으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는 듯 모르는 단어가 여러 개 겹칠 때입니다. ‘상대적’, ‘전제’, ‘양상’, ‘귀결’ 같은 말이 한 문단에 함께 나오면 문장 전체가 흐려집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단순 암기가 아니라 말 사이의 관계를 읽는 힘입니다.

한자어를 알면 어려운 말이 조금 덜 무섭습니다

우리말 어휘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큽니다. 특히 교과서, 기사, 설명문, 시험 지문에는 한자어가 자주 나옵니다. 그래서 한자를 전부 쓰고 외우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자주 쓰이는 한자 성분의 뜻을 알면 낯선 단어 앞에서 덜 당황합니다.

예를 들어 ‘독서’의 ‘독’은 읽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해독’, ‘판독’, ‘낭독’을 이어 보면 ‘읽다’라는 중심이 조금씩 변하면서 쓰입니다. 해독은 풀어 읽는 것이고, 판독은 판단하여 읽는 것이며, 낭독은 소리 내어 읽는 일입니다. 이렇게 묶어서 보면 단어 하나가 외딴섬처럼 남지 않습니다.

‘능력’, ‘역량’, ‘소양’도 학생들이 자주 헷갈립니다. 능력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을 넓게 말합니다. 역량은 실제 상황에서 발휘되는 힘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소양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지식과 태도에 가깝습니다. 세 단어를 같은 뜻으로 처리하면 글의 분위기를 놓치기 쉽습니다. 어휘력은 이런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데서 커집니다.

맞춤법도 결국 어휘력과 이어져 있습니다

아이들이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저는 먼저 손가락으로 칠판을 짚어 봅니다. “이건 가리키는 거야.” 그다음 설명을 덧붙입니다. “내용을 알려 주는 건 가르치는 거고.” 이렇게 몸짓과 상황을 붙이면 단어가 오래 남습니다. 맞춤법은 규칙만의 문제가 아니라 뜻을 구별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맞히다’와 ‘맞추다’도 그렇습니다. 정답을 맞히는 것은 옳은 답을 골라 적중시키는 일입니다.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은 서로 들어맞게 조정하는 일입니다. 둘 다 ‘맞다’와 관련이 있지만 쓰임의 방향이 다릅니다. 이 차이를 모르고 소리만 따라 쓰면 늘 흔들립니다.

그래서 저는 맞춤법을 가르칠 때 “이게 맞다”에서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왜 이 말이 그렇게 굳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갈라졌는지까지 말해 주면 학생들이 훨씬 덜 틀립니다. 어휘력은 바른 표기를 떠받치는 바닥입니다.

어휘력이 부족하면 읽기 속도보다 이해가 먼저 느려집니다

읽기 속도가 느린 학생을 보면 단순히 눈이 느린 경우보다 단어 처리에서 막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문장을 읽는 동안 뜻을 자꾸 되짚어야 하니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집중력이 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어의 의미망이 촘촘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 정책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었으나 장기적으로는 부작용을 초래했다”라는 문장을 봅시다. 여기서 ‘단기적’, ‘장기적’, ‘초래하다’가 흐리면 문장 구조를 알아도 내용이 선명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 단어들이 익숙하면 글쓴이가 시간의 차이를 놓고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보입니다.

  • 모르는 단어는 뜻만 적지 말고 함께 쓰인 문장을 남긴다.
  • 비슷한 단어는 차이를 한 줄로 비교한다.
  • 한자어는 공통으로 반복되는 글자나 뜻을 묶어 본다.
  • 속담과 사자성어는 쓰이는 상황까지 같이 익힌다.

이 네 가지는 거창한 공부법이 아닙니다. 다만 단어를 낱개로 외우지 않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어휘는 혼자 서 있을 때보다 문장, 상황, 비슷한 말과 함께 있을 때 훨씬 잘 붙습니다.

어휘력은 생활어와 학습어를 잇는 다리입니다

가정에서 자주 쓰는 말과 학교에서 요구하는 말은 다릅니다. 아이가 일상 대화는 잘하는데 교과서 문장을 어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길이 막혔다”는 쉽게 이해하지만, “강수량 증가로 교통 흐름이 지체되었다”는 갑자기 낯설어집니다. 내용은 비슷한데 표현의 층위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 차이를 꾸준히 건너야 문해력이 올라갑니다. 생활어를 학습어로 바꾸어 말해 보는 연습이 도움이 됩니다. ‘줄었다’를 ‘감소했다’로, ‘늘었다’를 ‘증가했다’로, ‘일어났다’를 ‘발생했다’로 바꾸어 보는 식입니다. 반대로 어려운 문장을 쉬운 말로 풀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바꾸는 능력은 그 말을 정말 이해했다는 증거입니다.

사자성어나 속담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부담이 줄어듭니다. ‘우공이산’을 네 글자로만 외우면 금방 잊습니다. 늙은 사람이 산을 옮기려 했다는 이야기,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여도 꾸준히 하면 결국 뜻을 이룬다는 맥락을 알면 오래 갑니다. 유래가 붙은 말은 기억에 자리를 잡습니다.

어휘 공부는 많이보다 자주가 낫습니다

어휘력은 한 번에 확 늘지 않습니다. 매일 10분씩이라도 낯선 말을 붙잡고, 그 말이 쓰인 문장을 읽고, 비슷한 말과 다른 점을 생각하는 시간이 쌓여야 합니다. 초등 고학년부터 중학생까지는 특히 이 시기가 중요합니다. 이때 익힌 어휘가 이후 설명문, 논설문, 문학 작품을 읽는 바탕이 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단어를 예쁘게 베껴 쓰는 것보다 ‘내 문장 하나’를 만들라고 말합니다. ‘완화’라는 말을 배웠다면 “긴장이 완화되었다”처럼 자기 경험에 가까운 문장을 써 보는 겁니다. 어색하면 고치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단어가 손에 익습니다.

어휘력은 시험 점수만을 위한 기술이 아닙니다. 사람의 말을 정확히 듣고, 글쓴이의 생각을 덜 오해하고, 내 생각을 조금 더 알맞은 말로 꺼내는 힘입니다. 단어 하나를 제대로 아는 일은 생각 하나를 더 또렷하게 갖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휘 공부를 서두르지 말자고 말합니다. 천천히 익힌 말이 오래 남고, 오래 남은 말이 결국 읽는 힘과 쓰는 힘을 함께 키웁니다.

어휘력은 왜 성적보다 먼저 흔들릴까요?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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