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필순 원칙은 왜 그런 순서로 쓸까요?

수업 시간에 학생이 十을 쓰다가 잠깐 멈춘 적이 있습니다. 세로획을 먼저 그어도 모양은 똑같은데, 왜 가로획부터 써야 하느냐고 묻더군요. 글자만 보면 그럴듯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한자는 완성된 모양뿐 아니라 획을 이어 가는 흐름까지 생각하며 쓰는 글자입니다.
필순(筆順)은 획을 긋는 순서입니다. ‘붓 필’과 ‘차례 순’을 쓰지요. 한자 필순 원칙을 낱개로 외우면 글자가 늘어날수록 헷갈립니다. 먼저 어디에서 붓을 대고, 어느 부분을 남겨 두어야 글자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지 생각하면 순서가 조금씩 보입니다.
붓은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일까요?
가장 익숙한 흐름은 위에서 아래, 왼쪽에서 오른쪽입니다. 三은 위의 가로획부터 차례로 쓰고, 川은 왼쪽 획부터 씁니다. 세 획을 어떤 순서로 그어도 읽는 데에는 지장이 없지만, 같은 방향으로 손을 움직이면 다음 획을 놓을 자리를 가늠하기 쉽습니다.
획이 만날 때는 다른 원칙도 필요합니다. 十은 가로획을 먼저 긋고 세로획을 내립니다. 人은 왼쪽으로 내려가는 삐침을 먼저 쓰고, 오른쪽으로 뻗는 파임을 나중에 씁니다. 교실에서는 十과 人을 나란히 써 보게 합니다. 글자 두 개만으로도 ‘가로 다음 세로’, ‘삐침 다음 파임’이라는 서로 다른 움직임을 손으로 느낄 수 있거든요.
다만 ‘위에서 아래’가 모든 획보다 앞서는 절대 규칙은 아닙니다. 十의 교차나 人의 두 획처럼 글자의 짜임을 함께 봐야 합니다. 미래엔 중학교 한문 교사용 교과서도 이를 ‘필순의 일반적 원칙’으로 설명합니다. ‘일반적’이라는 말에 눈길을 둘 만합니다. 원칙은 처음 보는 글자의 순서를 짐작하게 해 주지만, 각 글자의 실제 필순을 모두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테두리는 왜 마지막에 닫을까요?
口를 네모 그림처럼 네 줄로 나누어 쓰는 학생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口는 세 획입니다. 왼쪽 세로획을 긋고, 윗부분에서 오른쪽으로 가다가 아래로 꺾어 한 획을 씁니다. 아래 가로획을 그어 닫습니다. 붓을 떼지 않고 이어 쓴 선은 방향이 꺾여도 한 획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回나 國처럼 안에 다른 부분이 들어가는 글자도 아래쪽을 남겨 둡니다. 바깥의 왼쪽과 위·오른쪽을 먼저 쓰고, 안쪽을 채운 다음 마지막 가로획으로 문을 닫듯 마칩니다. 國의 안쪽을 쓰기 전에 테두리부터 완전히 닫아 버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안에 들어갈 부분의 크기를 맞추기가 한결 답답해집니다. 실제 종이 위에서 공간을 남겨 두며 쓰는 순서라고 이해하면 기억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바깥부터 쓴다’와 ‘아래는 나중에 닫는다’는 서로 어긋나는 말이 아닙니다. 바깥의 틀을 먼저 잡되, 안쪽을 쓸 공간은 열어 두는 것입니다. 규칙 두 개를 따로 암기할 때보다 한 장면으로 떠올릴 때 훨씬 덜 헷갈립니다.
가운데 획과 받침은 언제 쓸까요?
小는 가운데 세로획을 먼저 쓰고 양옆의 점을 씁니다. 가운데가 글자의 중심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中은 바깥의 口 모양을 쓴 뒤, 한가운데를 꿰뚫는 세로획을 마지막에 내립니다. 둘 다 가운데 획이 눈에 띄지만 순서는 다릅니다. 小의 가운데 획은 양옆을 놓을 기준이고, 中의 세로획은 이미 놓인 부분을 관통하는 획이라고 보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받침도 글자의 구조를 보며 판단합니다. 道와 近에 들어가는 책받침 辶은 안쪽 부분을 먼저 쓰고 마지막에 씁니다. 길이 글자의 아래와 오른쪽을 감싸는 듯한 모양을 떠올리면 됩니다. 그렇다고 ‘아래에 있는 부분은 무조건 마지막’이라고 넓혀 외우지는 않는 편이 좋습니다. 어느 부분이 받치는지, 어떻게 감싸는지에 따라 쓰는 흐름이 달라집니다.
작지만 자주 놓치는 획도 있습니다. 犬은 大와 비슷해 보이지만 오른쪽 위에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점은 마지막에 찍습니다. 끝의 점을 빼먹으면 다른 글자처럼 보일 수 있으니, 글자를 다 쓴 뒤 그 자리에 점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유용합니다.
필순을 외우기보다 어떻게 익히면 좋을까요?
처음부터 복잡한 글자를 여러 번 베껴 쓰면 손은 바쁜데 이유는 남지 않습니다. 저는 三, 川, 十, 人, 口, 小, 中을 먼저 권합니다. 일곱 글자를 한 번씩 천천히 쓰며 ‘위에서 아래’, ‘가로 다음 세로’, ‘가운데 먼저’, ‘관통은 나중’처럼 지금 손이 하는 일을 말로 붙여 봅니다. 그러고 나서 回와 道로 넘어가면 테두리와 받침의 순서까지 연결됩니다.
같은 글자를 쓸 때는 획수도 함께 세어 보면 좋습니다. 口를 세 획으로 쓰는지, 꺾이는 획에서 괜히 붓을 떼지 않는지 확인하는 식입니다. 손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으면 글자 모양만 보고 막연히 따라 쓰는 단계에서 벗어납니다. 복잡한 글자에서 원칙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은 학교 교재나 신뢰할 만한 한자 사전의 필순을 확인하면 됩니다.
학생이 十을 다시 쓰던 날, 저는 ‘가로가 먼저야’라는 말만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획이 만나는 자리를 보며 써 보자고 했지요. 필순은 획마다 붙은 번호표라기보다 글자를 짜임새 있게 완성해 가는 길에 가깝습니다. 그 길이 보이기 시작하면 새로운 한자를 만나도 손이 덜 망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