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 규정 제 17항은 왜 하나만 남길까요?

교실에서 ‘귀띔’과 ‘귀틤’을 칠판에 나란히 쓰면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합니다. 둘 다 귀에 대고 슬쩍 알려 주는 말처럼 보이는데, 왜 하나만 맞을까요? 이런 때 표기만 외우면 다음 시험에서 또 헷갈립니다. 어떤 말이 널리 쓰이면서 표준어로 자리 잡았는지 알면 판단할 실마리가 생깁니다.
뜻이 같은 두 형태가 만나면
표준어 규정 제17항은 비슷한 발음의 여러 형태가 쓰일 때를 다룹니다. 뜻에 차이가 없고 그중 한 형태가 더 널리 쓰이면, 그 한 형태만 표준어로 삼는다는 내용입니다.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소리가 비슷한 형태들이 실제로 쓰여야 하고, 뜻이 같아야 하며, 더 널리 쓰이는 형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조항은 ‘단수 표준어’에 관한 규정입니다. 같은 뜻의 말이 조금씩 다른 소리로 떠돌 때, 공적인 글과 교육에서 쓸 형태를 하나 제시한 것이지요. 국립국어원 해설도 두 형태를 모두 인정했을 때 생길 혼란을 고려했다고 설명합니다. 규정만 읽으면 다소 딱딱하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말을 써 왔는지를 반영한 선택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여기서 ‘더 널리 쓰인다’는 말을 오늘 검색창에서 많이 보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표준어는 잠깐의 유행이나 개인의 말버릇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표준어 규정은 1988년에 고시되어 1989년부터 시행됐고, 이후 국립국어원은 언어 사용의 변화를 사전에도 반영해 왔습니다. 그러니 처음 듣는 형태를 곧바로 틀린 말이라 단정하기보다, 현재 사전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확인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귀띔과 꼭두각시는 왜 이렇게 쓸까요?
‘귀띔’은 남몰래 조금 알려 준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소리의 ‘귀틤’도 있었지만 제17항의 예시에서는 ‘귀띔’만 표준어로 삼았습니다. ‘귀에 대고 슬쩍 일러 준다’는 장면을 떠올리면 뜻이 기억에 남습니다. 다만 그 장면만으로 표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어떤 형태가 표준어로 굳었는지는 규정의 예시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꼭두각시’와 ‘꼭둑각시’도 같은 자리에서 다뤄집니다. 인형극의 인형을 가리킬 때도, 남의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할 때도 ‘꼭두각시’라고 적습니다. 가운데에 받침을 하나 더 넣은 ‘꼭둑각시’는 소리가 그럴듯해 보여 자주 망설이게 하지요. 국립국어원 상담 사례 역시 ‘꼭두각시’를 표준어로 안내합니다.
‘귀고리’와 ‘귀엣고리’에서는 말의 짜임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함정입니다. ‘귀에 거는 장식’이니 ‘귀엣고리’도 맞지 않을까 싶지만, 제17항은 ‘귀고리’를 택했습니다. 다만 ‘귀걸이’도 사전에 올라 있는 말입니다. 이 사례는 ‘귀엣고리’를 피해야 한다는 뜻이지, 귀에 거는 장식을 반드시 ‘귀고리’라고만 불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의 뿌리를 알아도 실제 쓰임을 봐야 합니다
저는 어휘를 가르칠 때 말의 생김새와 유래를 먼저 들려주는 편입니다. 그래도 어원처럼 보이는 설명 하나로 지금의 표준어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제17항의 ‘내색’과 ‘나색’이 좋은 예입니다. 국립국어원 해설에 따르면 과거에는 두 말을 다른 뜻으로 구별한 사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사실상 구별하기 어려워졌고 ‘나색’도 거의 쓰이지 않게 되어, ‘내색’만 표준어로 삼았습니다.
‘속상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는 문장을 떠올려 보세요. 여기서 필요한 것은 지금 사람들이 쓰는 ‘내색’입니다. 오래된 자료에서 ‘나색’을 만났다고 해서 무조건 오자라고 고칠 일은 아니지만, 오늘 쓰는 글에서는 현재의 표준형을 따라야 합니다. 말의 내력을 아는 일과 현재의 기준을 지키는 일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격식 있는 문장에서 쓰는 ‘-습니다’도 제17항의 예시에 들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습니다’와 ‘-읍니다’를 함께 적었지만, 국립국어원 해설은 두 형태의 의미 차이가 뚜렷하지 않고 일반적인 말에서는 ‘-습니다’가 훨씬 널리 쓰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읽습니다’, ‘먹습니다’라고 적습니다. 어미 하나에서도 그럴듯한 옛 형태보다 굳어진 현재의 쓰임을 기준으로 삼은 셈입니다.
비슷하다고 모두 하나로 줄이지는 않습니다
제17항을 배운 뒤 ‘발음이 비슷하면 하나만 표준어’라고 외우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실수가 생깁니다. 제18항은 두 형태가 모두 널리 쓰이는 경우 등에 복수 표준어를 인정합니다. ‘네’와 ‘예’처럼 둘 다 쓸 수 있는 말이 있지요. 같은 표준어 규정 안에서도 실제 사용 양상을 보고 다르게 판단한 것입니다.
새로 쓰이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조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새말이 유행한다는 사실과 표준어로 인정됐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글을 쓰다가 표기가 막히면 먼저 두 형태의 뜻이 같은지 생각하고, 이어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현재 표제어를 확인하면 좋습니다. 오래된 교재에서 본 표기와 지금의 기준이 다를 가능성도 그때 함께 살필 수 있습니다.
‘귀띔’ 하나를 기억할 때도 귀에 대고 비밀을 전하는 장면과 사람들이 굳혀 온 형태를 함께 떠올려 보세요. 규정의 문장을 외운 것보다 오래 남습니다.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표준어 규정 제17항은 그 움직임 속에서 한 형태가 자리 잡은 까닭을 보여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