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우리말은 왜 예쁜 말로만 기억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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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리말은 왜 예쁜 말로만 기억될까요?

얼마 전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선생님, ‘가온누리’ 같은 말이 순우리말 맞아요?” 하고 물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예쁜 순우리말 목록을 봤다는데, 막상 하나씩 짚어 보니 표준어로 쓰기 어려운 말도 있고, 만들어진 말처럼 보이는 표현도 섞여 있었습니다. 순우리말은 분명 매력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예쁜 말’로만 기억하면 오히려 우리말을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순우리말은 말 그대로 우리말 안에서 오래 살아온 고유어를 가리킵니다. 한자에서 온 말도 아니고, 영어 같은 외국어에서 들어온 말도 아닙니다. ‘하늘, 바다, 사람, 길, 마음, 밥, 손, 발, 아침, 저녁’ 같은 말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특별히 꾸민 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입에 올리는 가장 평범한 말들이 순우리말인 셈이지요.

순우리말은 ‘낯선 예쁜 말’만 뜻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순우리말을 떠올릴 때 ‘윤슬, 가람, 미르, 아리아’ 같은 말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말도 있습니다. 다만 순우리말의 중심에는 일상어가 있습니다. ‘먹다, 자다, 걷다, 웃다, 울다’처럼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 ‘작다, 크다, 높다, 낮다’처럼 상태를 나타내는 말도 모두 우리말의 오래된 층에 속합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자주 드는 비교가 있습니다. ‘식사하다’는 한자어 바탕의 말이고, ‘밥 먹다’는 고유어 바탕의 말입니다.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느낌이 다릅니다. ‘식사하셨어요?’는 조금 공손하고 거리감이 있습니다. ‘밥 먹었어?’는 더 가깝고 생활의 냄새가 납니다. 순우리말의 힘은 여기 있습니다. 거창하지 않은데 사람 사이의 온도를 잘 전합니다.

  • 고유어: 하늘, 바람, 마음, 밥, 길, 손, 웃다
  • 한자어: 학교, 도서관, 가족, 시간, 식사, 감정
  • 외래어: 버스, 커피, 라디오, 컴퓨터, 피아노

이렇게 나누어 보면 순우리말이 꼭 어려운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 보입니다. 오히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따로 의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왜 한자어와 섞여 쓰이게 되었을까요?

우리말은 오래전부터 한자 문화권 안에서 글과 제도를 받아들이며 커졌습니다. 그래서 법, 학문, 행정, 종교, 관직과 관련된 말에는 한자어가 많습니다. ‘교육, 사회, 경제, 정치, 문화’ 같은 말은 일상에서도 자주 쓰지만 말의 뿌리는 한자입니다. 한자어가 많다고 해서 우리말이 약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말은 고유어와 한자어를 함께 품으면서 표현의 층을 넓혀 왔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과 ‘심정’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아프다’는 몸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말이고, ‘심정이 복잡하다’는 조금 더 설명적입니다. ‘길’과 ‘도로’도 그렇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삶의 장면이 떠오르고, ‘차량 통행 도로’는 제도와 시설의 느낌이 강합니다. 이런 차이를 알면 글을 쓸 때 단어 선택이 훨씬 또렷해집니다.

순우리말 맞춤법은 소리보다 형태를 봐야 합니다

순우리말은 소리 나는 대로만 적으면 헷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같이’입니다. 실제 발음은 [가치]에 가깝지만 표기는 ‘같이’입니다. 왜냐하면 기본형이 ‘같다’이고, 여기에 ‘-이’가 붙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맞춤법은 뜻을 가진 말의 모양을 되도록 밝혀 적는 쪽을 택합니다. 그래서 ‘꽃이’도 [꼬치]처럼 들리지만 ‘꽃이’라고 적습니다.

이 원리를 알면 ‘낳다, 낫다, 낮다’ 같은 말도 조금 덜 무섭습니다. ‘아이를 낳다’의 ‘낳다’는 새 생명이 세상에 나오는 뜻이고, ‘병이 낫다’는 좋아지는 뜻이며, ‘기온이 낮다’의 ‘낮다’는 높이가 아래쪽이라는 뜻입니다. 발음이 비슷하다고 같은 말이 아닙니다. 말의 뿌리와 뜻이 다르면 표기도 달라집니다.

실수하기 쉬운 순우리말 표기

  • 설거지: ‘설겆이’가 아니라 ‘설거지’입니다. 예전에는 ‘설겆다’와 관련해 생각하기 쉬웠지만, 지금 표준어는 ‘설거지’로 굳었습니다.
  • 며칠: ‘몇 일’로 나누어 적지 않습니다. ‘몇’과 ‘일’이 그대로 결합한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 표준 표기는 ‘며칠’입니다.
  • 왠지: ‘왜인지’가 줄어든 말이라 ‘왠지’로 적습니다. 반면 ‘웬 사람’의 ‘웬’은 ‘어찌 된’ 정도의 뜻입니다.
  • 되레: ‘도리어’가 줄어든 말입니다. 말맛은 가볍지만 표기는 분명히 익혀 둘 만합니다.

맞춤법을 외울 때 자꾸 잊는 이유는 낱말을 따로따로 붙잡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적는가’를 알면 기억이 오래갑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맞춤법을 표지판처럼 보라고 말합니다. 표지판은 길을 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길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예쁜 순우리말 목록을 볼 때 조심할 점

인터넷에는 순우리말 이름, 순우리말 닉네임, 순우리말 상호를 모아 둔 글이 많습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든 말이 실제 표준어로 안정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말은 옛말이고, 어떤 말은 방언이며, 어떤 말은 뜻이 과장되어 퍼진 경우도 있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우리말샘에서 쓰임을 확인하면 이런 혼란을 꽤 줄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람’은 강을 뜻하는 옛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름이나 문학적 표현으로는 아름답게 쓸 수 있지만, 현대 일상문에서 “가람을 건넜다”라고 쓰면 독자에게 낯설게 느껴집니다. ‘미르’ 역시 용을 뜻하는 옛말로 소개되지만, 지금 보통의 문장에서는 설명 없이 쓰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순우리말을 고를 때는 아름다운 소리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지도 함께 봐야 합니다.

반대로 너무 익숙해서 귀하게 여기지 않는 말도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계절 이름이면서 모두 우리말의 감각을 잘 품은 낱말입니다. ‘비, 눈, 바람, 구름’도 그렇습니다. 이런 말은 짧고 투명합니다. 뜻을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장면이 바로 떠오릅니다. 좋은 글은 꼭 어려운 낱말을 골라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제법 많은 경우, 오래된 쉬운 말이 문장을 살립니다.

글을 쓸 때 순우리말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요?

순우리말만 써야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어 교사로 오래 지내며 느낀 점은, 좋은 문장은 한 종류의 낱말만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필요할 때는 한자어가 정확하고, 생활의 감각을 전할 때는 고유어가 힘을 냅니다. ‘감정을 표현했다’보다 ‘마음을 드러냈다’가 더 자연스러운 자리도 있고, ‘문제점을 개선했다’가 ‘나쁜 점을 고쳤다’보다 더 알맞은 자리도 있습니다.

학생 글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자주 봅니다. “저는 해당 상황에서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라고 쓰면 틀린 문장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일을 듣고 마음이 한참 가라앉았습니다”라고 쓰면 읽는 사람이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순우리말은 대개 몸의 감각과 생활의 장면을 잘 데리고 옵니다. 그래서 설명문보다 수필, 편지, 독후감, 생활글에서 특히 빛이 납니다.

순우리말을 잘 쓰려면 낯선 낱말을 많이 외우는 것보다 익숙한 낱말을 정확히 보는 일이 먼저입니다. ‘마음’과 ‘가슴’은 어떻게 다르고, ‘걷다’와 ‘거닐다’는 어떤 장면에서 갈라지는지 느껴 보는 것입니다. 말은 지식이기도 하지만 습관입니다. 매일 쓰는 말의 결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문장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순우리말은 박물관에 넣어 두는 오래된 말이 아닙니다. 지금도 밥상에서, 교실에서, 문자 메시지에서 살아 움직이는 말입니다. 예쁜 이름을 찾다가 순우리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괜찮습니다. 다만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면 좋겠습니다. ‘이 말이 어디서 왔는가’, ‘지금도 자연스럽게 통하는가’, ‘내 문장에서 어떤 느낌을 만드는가’를 생각하는 순간, 순우리말은 장식이 아니라 문장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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