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문해력 키우기, 책을 많이 읽기만 하면 될까요?

얼마 전 수업에서 40대 직장인 학습자 한 분이 계약서 문장을 들고 오셨습니다. 글자는 다 읽겠는데, 도대체 어느 문장이 의무이고 어느 문장이 예외인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사실 성인 문해력은 ‘글자를 읽을 줄 아느냐’보다 ‘문장 속 관계를 붙잡을 수 있느냐’에 가깝습니다.
성인 문해력은 속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인이 되면 우리는 이미 많은 글을 읽습니다. 문자 메시지, 공지, 약관, 보고서, 뉴스 제목, 은행 안내문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 읽지요. 그런데 많이 읽는 것과 정확히 읽는 것은 다릅니다. 특히 성인에게 어려운 글은 낯선 단어가 많은 글보다, 익숙한 단어가 복잡하게 엮인 글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신청일로부터 14일 이내에 증빙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경우 접수가 취소될 수 있다”라는 문장을 봅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4일’, ‘증빙서류’, ‘취소’가 아닙니다. ‘하지 않은 경우’와 ‘될 수 있다’가 문장의 힘을 정합니다. 조건과 가능성을 읽어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학생들에게도, 성인 학습자에게도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글은 단어장으로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장이 어떤 순서로 생각을 밀고 가는지 봐야 합니다.
어휘는 뜻보다 쓰임을 잡아야 오래 갑니다
문해력 키우기에서 어휘는 빠질 수 없습니다. 다만 성인에게 필요한 어휘 공부는 단순 암기가 아닙니다. “유예는 미루는 것”, “철회는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뜻만 외우면 금방 흐려집니다. 대신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함께 잡아야 합니다.
‘보류’, ‘유예’, ‘연기’는 모두 뒤로 미루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쓰임은 조금씩 다릅니다. 보류는 판단이나 결정을 잠시 멈추는 데 가깝고, 유예는 정해진 의무나 집행을 일정 기간 늦추는 느낌이 강합니다. 연기는 행사나 일정처럼 예정된 일을 뒤로 미룰 때 자연스럽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뉴스나 공문을 읽을 때 문장이 선명해집니다. “징계가 보류됐다”와 “집행이 유예됐다”는 비슷해 보여도 무게가 다릅니다. 어휘력은 단어를 많이 아는 힘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는 단어 사이의 거리를 아는 힘입니다.
성인에게 효과적인 15분 읽기 방식
하루에 한 시간씩 읽겠다고 마음먹으면 사흘 뒤에 흐지부지되기 쉽습니다. 저는 성인 문해력 훈련은 15분 단위가 가장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짧아 보여도 방법이 분명하면 꽤 단단한 시간이 됩니다.
- 첫 5분은 글을 천천히 읽으며 모르는 단어보다 반복되는 단어를 표시합니다.
- 다음 5분은 문장 사이의 관계를 봅니다. 이유인지, 예시인지, 반박인지, 조건인지 나눕니다.
- 마지막 5분은 글의 내용을 세 문장으로 다시 씁니다. 그대로 베끼지 말고 자기 말로 바꿉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 문장’입니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너무 뭉뚱그려지고, 열 문장으로 쓰면 거의 필사가 됩니다. 세 문장은 생각을 남기기에 적당한 길이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해도 2주 정도만 해 보면 글을 읽는 눈이 달라집니다.
긴 글이 어렵다면 접속어부터 보세요
긴 글을 읽다가 길을 잃는 분들은 대부분 문단의 방향을 놓칩니다. 이때 접속어가 좋은 표지판이 됩니다. ‘그런데’가 나오면 앞말과 다른 방향이 열리고, ‘따라서’가 나오면 앞의 내용을 근거로 판단이 내려옵니다. ‘예컨대’가 나오면 앞의 추상적인 말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근데 접속어만 기계적으로 외우면 또 잘 안 됩니다. 실제 글에서 표시해 보는 게 낫습니다. 신문 칼럼 한 편을 골라 ‘그러나’, ‘반면’, ‘즉’, ‘예를 들어’, ‘따라서’ 같은 말을 동그라미 치고, 그 앞뒤 문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세요. 글쓴이가 생각을 어떻게 꺾고 잇는지 보입니다.
특히 성인은 시험 지문보다 생활 문서를 많이 읽습니다. 보험 안내문, 대출 약정, 건강검진 결과, 회사 공지 같은 글이 실제 문해력을 요구합니다. 이런 글은 감상보다 확인이 중요합니다. 누가, 언제까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표시하며 읽으면 훨씬 덜 흔들립니다.
문해력을 키우는 사람은 질문을 다르게 합니다
문해력이 약할 때는 “이 글이 무슨 뜻이지?”라고 묻습니다. 물론 필요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면 질문이 바뀝니다. “글쓴이는 왜 이 말을 먼저 했지?”, “이 예시는 앞 문장을 도와주나, 반박하나?”, “여기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처럼 묻게 됩니다.
성인 문해력 키우기는 거창한 독서 계획보다 읽는 습관의 방향을 바꾸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르는 단어 하나를 찾는 일도 좋지만, 그 단어가 문장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문장은 단어의 줄이 아니라 생각의 길입니다.
저는 문해력이 늦게 자라는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인은 배경지식과 생활 경험이 있어서 방향만 잡으면 빠르게 좋아집니다. 하루 15분이라도 문장 관계를 보고, 단어의 쓰임을 비교하고, 자기 말로 세 문장 남기는 연습을 이어 가면 읽는 힘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은 남의 말을 그대로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그 말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차분히 붙잡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