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존법은 회사에서도 지켜야 할까요?

교실에서 높임법을 가르치다 보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께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도 아버지를 높여야 하나요?” 아이들은 ‘아버지가 왔습니다’와 ‘아버지께서 오셨습니다’ 사이에서 잠시 멈춥니다. 누구를 높여야 하는지는 알겠는데, 한 문장에 어른이 두 분 등장하면 말이 복잡해지는 거지요. 이때 등장하는 이름이 압존법입니다.
압존법의 ‘압’은 무엇을 누를까요?
압존법은 한자로 壓尊法이라고 씁니다. ‘높임을 누르는 말법’이라는 뜻입니다. 말하는 사람보다 높은 이를 가리키지만, 듣는 사람이 그보다 더 높을 때 가리키는 이에 대한 높임을 줄이는 방식이지요. 높일 사람을 함부로 낮추자는 뜻은 아닙니다. 듣는 사람과 이야기 속 인물의 관계까지 말에 담으려던 전통적인 언어 예절입니다.
손자가 할아버지께 “아버지가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아버지는 손자보다 높지만, 말을 듣는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압존법에서는 ‘아버지께서’ 대신 ‘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대신 ‘들어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문장 끝의 ‘-습니다’는 할아버지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야기 속 아버지를 높이는 일과 눈앞의 할아버지를 높이는 일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말을 ‘아비’로 바꿔야 한다고 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 언어생활에서는 그런 표현도 쓰였지만, 압존법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은 아닙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을 그대로 두고 서술어의 ‘-시-’를 쓰지 않는 예만으로도 원리가 드러납니다.
그럼 “아버지께서 오셨어요”는 틀렸을까요?
그렇게 단정하면 지금의 말살이를 놓치게 됩니다. 국립국어원 자료는 가정에서 쓰던 전통적인 압존법을 설명하면서도, 현대에는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를 높여 말하는 표현을 허용한다고 안내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라고 했다고 해서 틀린 말로 고칠 필요는 없습니다.
한때 압존법을 빠짐없이 지켜야 예의 바르다고 배운 분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가족 안에서 관계의 높낮이를 세밀하게 드러내던 말버릇과 오늘날 가족이 서로를 부르는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한 집에서는 “아버지가 오셨어요”가 자연스럽고, 다른 집에서는 “아버지께서 오셨어요”가 더 편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말을 듣는 할아버지께 공손하게 말하고 있는지, 가족 사이에서 어색하거나 무례하게 들리지 않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문장의 높임을 구별해 두면 혼란이 줄어듭니다. “아버지가 오셨어요”의 ‘-시-’는 동작의 주체인 아버지를 높이고, 끝의 ‘-어요’는 말을 듣는 할아버지에게 쓰는 말투입니다. 할아버지를 높이려고 ‘오셨어요’의 ‘-시-’를 넣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문장 안에서도 높임이 향하는 자리가 다릅니다.
직장에서는 왜 다르게 말할까요?
직장에서 압존법을 가장 자주 떠올리는 순간은 상사에게 다른 상사의 일을 전할 때입니다. 사장에게 과장의 일을 보고하면서 “김 과장이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라고 해야 할지, “김 과장님이 보고서를 작성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할지 망설이는 식이지요.
국립국어원의 『표준 언어 예절』은 가정이나 사제 관계에서 전해 온 압존법을 직장 같은 사회적 관계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는 듣는 사람이 더 높은 직급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야기 속 윗사람의 높임을 없애지 않는 것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사장 앞에서도 “김 과장님이 보고서를 작성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직급표를 머릿속에 그려 가며 ‘-시-’를 뺄 필요가 없는 셈입니다.
다만 높임의 정도는 살필 만합니다. 국립국어원이 든 직장 예에서는 더 높은 상사에게 보고할 때 “총무과장님께서”처럼 극진하게 높이기보다 “총무과장님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름 뒤의 ‘님’, 주격 조사 ‘이’, 서술어의 ‘-시-’가 언제나 한 묶음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과장님께서 하셨습니다”와 “과장님이 하셨습니다” 사이에도 상황에 따른 말의 거리감이 있습니다.
맞춤법 문제처럼 맞고 틀리고를 가를 수 있을까요?
압존법은 ‘되’와 ‘돼’처럼 표기를 하나로 판정하는 맞춤법 항목이 아닙니다. 국립국어원 온라인 상담도 압존법은 어문 규정에서 다루는 대상이 아니므로 개별 표현의 옳고 그름을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합니다. “압존법을 안 썼으니 문법적으로 틀렸다”는 식의 지적이 조심스러운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먼저 누가 말하고, 누가 듣고, 누구에 관해 말하는지 세 자리를 확인하면 됩니다. 가족 사이에서는 오래 써 온 압존 표현도, 이야기 속 어른을 높이는 표현도 자연스럽게 쓰입니다. 직장에서는 이야기 속 윗사람을 듣는 이보다 낮은 직급이라는 이유로 낮추지 않습니다. 상대를 실제로 어떻게 대하는지가 말의 선택에 더 큰 영향을 줍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압존법의 예문을 외우기보다, 한 문장 속에 서 있는 사람들을 먼저 그려 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왔습니다’라는 짧은 문장에도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이야기의 주인공 사이의 관계가 들어 있습니다. 그 관계를 알고 나면 높임말은 외워서 맞히는 문제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고르는 말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