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아이가 책을 안 읽어서만 부족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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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 아이가 책을 안 읽어서만 부족한 걸까요?

얼마 전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한 학생이 ‘다음 중 밑줄 친 말의 뜻으로 알맞은 것’을 거의 다 틀린 걸 봤습니다. 지문을 안 읽은 것도 아니고, 글씨를 대충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단어 하나였습니다. ‘완곡하게 거절했다’에서 ‘완곡하게’를 ‘완전히’쯤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러니 뒤 문장이 아무리 친절해도 뜻이 비틀렸지요.

문해력은 책을 많이 읽었느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문해력은 글자를 읽는 힘보다 조금 넓습니다. 낱말의 뜻을 알고, 문장 사이의 관계를 붙이고, 글쓴이가 직접 쓰지 않은 뜻까지 짐작하는 힘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결국 사과했다’와 ‘그는 마침내 사과했다’는 비슷해 보여도 느낌이 다릅니다. ‘결국’에는 앞선 갈등이나 버팀이 묻어 있고, ‘마침내’에는 기다림 끝의 도달감이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잡아내는 힘이 문해력입니다.

교실에서 보면 문해력이 약한 학생은 긴 글에서만 막히지 않습니다. 짧은 안내문에서도 멈춥니다. ‘3일 이내 제출’과 ‘3일 이후 제출’을 헷갈리고, ‘미만’과 ‘이하’를 같은 말처럼 처리합니다. 수학 문제가 아니라 어휘 문제에서 먼저 길을 잃는 셈입니다.

요즘 문해력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까닭

학생들이 예전보다 덜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읽는 환경이 바뀌었습니다. 짧은 영상, 짧은 댓글, 짧은 문장에 익숙해지면 머리는 빠르게 반응하는 데 능숙해집니다. 대신 한 문장을 붙들고 앞뒤를 대조하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읽기의 근육이 다른 방향으로 발달하는 거지요.

실제로 수업 시간에 20줄짜리 글을 주면 처음 5줄은 잘 따라오다가 10줄쯤 지나서 ‘그러니까 이 사람이 찬성한다는 거예요, 반대한다는 거예요?’ 하고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어를 몰라서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면’, ‘따라서’, ‘이를테면’ 같은 연결어를 신호등처럼 읽지 못하면 글의 방향을 놓칩니다.

  • ‘그러나’가 나오면 앞말과 뒷말이 부딪힙니다.
  • ‘예컨대’가 나오면 앞의 생각을 사례로 보여 줍니다.
  • ‘따라서’가 나오면 앞 내용을 바탕으로 판단이 나옵니다.
  • ‘오히려’가 나오면 예상과 다른 쪽으로 방향이 꺾입니다.

이 네 가지 신호만 제대로 봐도 글의 뼈대가 훨씬 잘 보입니다. 문해력은 타고나는 감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작은 읽기 습관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어휘를 모르면 문장은 겉으로만 읽힙니다

제가 어휘 수업에서 자주 드는 예가 ‘심심한 사과’입니다. 여기서 ‘심심하다’는 재미없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의 표현 정도가 깊고 간절하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심심하다’를 대부분 ‘지루하다’로만 쓰다 보니, 공식적인 사과문을 읽고도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생깁니다.

‘사흘’도 그렇습니다. 사흘은 3일, 나흘은 4일입니다. 숫자 ‘4’와 소리가 비슷하다고 해서 사흘을 4일로 기억하면 일정 안내를 잘못 읽게 됩니다. ‘금일’은 오늘, ‘익일’은 다음 날, ‘작일’은 어제입니다. 이런 말이 꼭 어려운 한자어라서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공문, 학교 안내, 회사 메일, 은행 문서에서 아직 살아 움직이는 말입니다.

뜻을 외우기보다 쓰임을 같이 봐야 합니다

낱말 뜻만 따로 외우면 금방 흩어집니다. ‘반려’가 좋은 예입니다. 반려동물의 ‘반려’는 짝이 되어 함께한다는 뜻에 가깝지만, 서류가 ‘반려’되었다고 할 때는 처리하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는 뜻입니다. 같은 표기라도 문맥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합니다. 문해력은 이런 얼굴 바뀜을 알아차리는 힘입니다.

문장을 읽을 때는 ‘왜’와 ‘그래서’를 붙여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글을 읽히면 밑줄을 참 열심히 긋습니다. 그런데 밑줄이 너무 많으면 아무것도 고르지 않은 것과 비슷합니다. 저는 보통 한 문단을 읽고 두 가지만 묻습니다. ‘왜 그렇다고 하지?’ 그리고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지?’ 이 두 질문이 글의 허리를 잡아 줍니다.

예를 들어 ‘청소년의 독서 시간이 줄었다. 그러나 정보 접근 능력이 반드시 낮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글쓴이는 독서 시간 감소를 말하면서도 단순한 비관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방향을 틉니다. 여기서 앞문장만 보고 ‘요즘 학생들은 정보에 약하다’고 읽으면 글쓴이의 의도와 멀어집니다.

  • 처음 읽을 때는 모르는 낱말에 표시합니다.
  • 두 번째 읽을 때는 연결어를 동그라미 칩니다.
  • 세 번째 읽을 때는 문단마다 중심 문장을 하나만 고릅니다.
  • 마지막에는 제목을 새로 붙여 봅니다.

이 방법은 느려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오히려 빠릅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덤비지 않고, 낱말과 구조와 의도를 차례로 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문해력은 생활 속 말에서 먼저 자랍니다

문해력을 키우겠다고 갑자기 어려운 책부터 들이밀 필요는 없습니다. 버스 안내문, 병원 문자, 학교 가정통신문, 약 봉투 설명서도 훌륭한 읽기 자료입니다. ‘식전 30분’은 밥 먹기 전 30분이고, ‘1일 3회’는 하루 세 번입니다.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이런 문구를 정확히 읽는 힘이 먼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는 아이가 모르는 말을 물었을 때 바로 사전 뜻만 던져 주기보다 문장 속에서 다시 읽게 하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뜻이어야 앞뒤가 맞을까?’ 하고 같이 짚으면 됩니다. 틀렸다고 끊어 버리면 아이는 단어를 숨깁니다. 모르는 말을 드러내야 문해력이 자랍니다.

국어를 오래 가르치며 느낀 건, 문해력은 거창한 능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낱말 하나를 그냥 넘기지 않는 습관, 접속사 하나에서 글의 방향을 보는 습관, 모르는 표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분위기. 이 세 가지가 쌓이면 글은 조금씩 덜 무섭고, 말은 훨씬 더 또렷해집니다.

문해력, 아이가 책을 안 읽어서만 부족한 걸까요?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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