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 규정 제9항, 왜 ‘냄비’는 맞고 ‘아지랭이’는 틀릴까요?

Last Updated :
표준어 규정 제9항, 왜 ‘냄비’는 맞고 ‘아지랭이’는 틀릴까요?

수업하다 보면 학생들이 의외로 자주 묻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 냄비는 원래 남비였다면서요? 그런데 왜 아지랭이는 안 돼요?” 이런 질문은 꽤 좋습니다. 단어 하나를 외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표준어가 어떤 기준으로 굳어졌는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표준어 규정 제9항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뒤에 오는 ‘ㅣ’ 소리 때문에 앞의 모음이 바뀌는 현상, 곧 ‘ㅣ’ 역행 동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현행 표준어 규정은 문화체육관광부 고시로 2017년 3월 28일부터 시행된 체계를 따르고, 국립국어원 안내에서도 같은 기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ㅣ’ 역행 동화가 먼저입니다

‘ㅣ’ 역행 동화라는 말은 조금 딱딱하지만 원리는 단순합니다. 뒤에 ‘ㅣ’나 ‘ㅣ’와 비슷한 소리가 오면, 앞의 모음이 그쪽으로 끌려가듯 바뀌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아지랑이’를 빠르게 말하다 보면 ‘아지랭이’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남비’가 ‘냄비’처럼 변한 것도 같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어에서는 이런 발음 변화가 낯선 일이 아닙니다. 말은 입에서 편한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표준어는 “사람들이 그렇게 발음하니 모두 표준으로 삼자”라고 쉽게 정하지 않습니다. 발음이 편해졌다는 사실과 표준어로 인정할 만한가 하는 판단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제9항은 원칙을 먼저 세웁니다. ‘ㅣ’ 역행 동화 현상에 따른 발음은 원칙적으로 표준 발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일부 단어는 이미 동화된 형태가 널리 굳었으므로 예외로 인정합니다. 이 ‘원칙과 예외’의 구조를 알아야 제9항이 헷갈리지 않습니다.

예외로 인정된 말: 냄비, -내기, 동댕이치다

제9항에서 동화가 적용된 형태를 표준어로 삼은 대표적인 말은 ‘냄비’, ‘-내기’, ‘동댕이치다’입니다. 예전 형태로 보면 ‘남비’, ‘-나기’, ‘동당이치다’ 쪽을 떠올릴 수 있지만,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바뀐 꼴이 훨씬 자연스럽게 굳었습니다.

  • 냄비: ‘남비’가 아니라 ‘냄비’가 표준어입니다.
  • 서울내기, 시골내기, 신출내기, 풋내기: ‘-나기’가 아니라 ‘-내기’가 표준어입니다.
  • 동댕이치다: ‘동당이치다’가 아니라 ‘동댕이치다’가 표준어입니다.

특히 ‘냄비’는 설명하기 좋은 단어입니다. 이 말은 일본어에서 온 말로 보는데, 한때는 원형을 의식해 ‘남비’ 쪽으로 처리하려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상 언어에서는 이미 ‘냄비’가 너무 강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어원보다 현실 발음이 앞선 셈입니다. 표준어 규정은 이럴 때 무조건 옛 모양만 붙들지 않습니다. 널리 굳은 말은 표준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지랭이’는 안 될까요?

여기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고개를 갸웃합니다. ‘냄비’가 된다면 ‘아지랭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9항의 붙임에서는 ‘아지랑이’를 표준어로 삼고, ‘아지랭이’는 버립니다.

이유는 간단히 말해 표준어로 굳은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지랑이’는 동화가 일어나지 않은 형태가 표준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실제 발음에서는 ‘아지랭이’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표준어 규정은 그 발음형을 표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느냐”는 불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실 표준어 규정은 수학 공식처럼 모든 낱말에 기계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원칙을 세우고, 언중의 사용 양상과 어원 의식, 이미 굳어진 정도를 함께 봅니다. 그래서 ‘냄비’는 예외로 인정되고, ‘아지랑이’는 원래 형태가 유지됩니다.

‘-장이’와 ‘-쟁이’는 뜻으로 가릅니다

표준어 규정 제9항에서 꼭 함께 봐야 할 것이 ‘-장이’와 ‘-쟁이’입니다. 이 둘은 단순히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의미가 다릅니다.

기술자, 특히 손으로 어떤 일을 익혀 해내는 수공업적 기술자에게는 ‘-장이’를 씁니다. 그래서 ‘미장이’, ‘유기장이’가 맞습니다. 벽을 바르는 일을 하는 사람은 ‘미장이’이지 ‘미쟁이’가 아닙니다. 놋그릇 따위를 만드는 장인도 ‘유기장이’입니다.

반대로 성질, 습관, 모양, 상태를 나타내거나 어떤 사람을 낮추어 이르는 말에는 ‘-쟁이’를 씁니다.

  • 멋쟁이: 멋을 잘 부리는 사람입니다.
  • 욕심쟁이: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 소금쟁이: 곤충 이름입니다.
  • 담쟁이덩굴: 식물 이름입니다.
  • 골목쟁이, 발목쟁이: 특정한 자리나 부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멋장이야’라고 쓰면 표준어 기준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멋쟁이’가 맞습니다. 반대로 기술자를 가리키는 말에서는 ‘미쟁이’가 아니라 ‘미장이’입니다. 이 구별은 외워도 되지만, 뜻을 붙잡으면 훨씬 오래갑니다. 기술자는 ‘장이’, 그 밖의 성질이나 대상은 대체로 ‘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표준어는 발음을 따라가되, 다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제9항을 공부할 때 가장 조심할 점은 “사람들이 많이 말하면 다 표준어가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말의 현실은 중요하지만, 표준어는 그 현실을 일정한 기준으로 걸러 냅니다. 그래서 ‘냄비’처럼 현실 발음이 표준어가 된 경우도 있고, ‘아지랑이’처럼 동화되지 않은 형태를 지킨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이 조항을 설명할 때 늘 세 칸으로 나누어 적게 합니다. 첫째, 원칙은 ‘ㅣ’ 역행 동화를 표준 발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 예외로 ‘냄비’, ‘-내기’, ‘동댕이치다’가 있다는 것. 셋째, ‘-장이’와 ‘-쟁이’는 발음보다 뜻으로 가른다는 것. 이렇게 나누면 시험 문제에서도 덜 흔들립니다.

우리말 규정은 딱딱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실제로 써 온 흔적이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냄비’ 하나에도 어원, 발음 변화, 언중의 선택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맞춤법과 표준어는 단순한 암기 과목이 아닙니다. 말이 굳어지는 과정을 읽는 일에 가깝습니다. 그 과정을 한 번 이해하면, ‘아지랑이’와 ‘아지랭이’ 앞에서 손이 멈칫하더라도 다시 바른 쪽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표준어 규정 제9항, 왜 ‘냄비’는 맞고 ‘아지랭이’는 틀릴까요? | 어휘마스터 : https://word.or.kr/716
어휘마스터 © word.or.kr All rights reserved. powered by modoo.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