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 규정 제5항, 왜 강남콩이 아니라 강낭콩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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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 규정 제5항, 왜 강남콩이 아니라 강낭콩일까요?

얼마 전 수업에서 한 학생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강남에서 온 콩이면 강남콩이 맞는 거 아닌가요? 꽤 그럴듯한 질문입니다. 말의 뿌리를 따지면 학생 말이 틀렸다고만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는 강남콩이 아니라 강낭콩이 표준어로 올라 있습니다. 바로 이럴 때 필요한 조항이 표준어 규정 제5항입니다.

표준어 규정 제5항은 제1부 표준어 사정 원칙, 그중에서도 발음 변화에 따른 표준어 규정에 들어 있습니다. 현재 법제처와 국립국어원에서 확인되는 표준어 규정은 2017년 3월 28일 일부 개정 고시 기준으로 시행되고 있고, 이 조항의 뼈대는 오래전부터 우리말 표준어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쓰여 왔습니다.

표준어 규정 제5항은 무엇을 말하나요?

제5항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원에서 멀어진 형태로 굳어져 널리 쓰이는 것은 그 굳어진 형태를 표준어로 삼는다는 원칙입니다. 말의 출발점보다 현재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굳은 형태를 더 중요하게 보겠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원에서 멀어진’이고, 다른 하나는 ‘굳어져서 널리 쓰이는’입니다. 아무 말이나 사람들이 조금 다르게 발음한다고 곧바로 표준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써 왔고, 이미 원래 모양을 의식하지 않는 단계까지 간 말이어야 합니다.

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이 표준어를 마치 맞고 틀림의 벌점표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 규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은 어원 쪽이 더 그럴듯해도, 생활 속에서 굳어진 말이 표준어가 됩니다. 표준어 규정 제5항은 바로 그 지점을 보여 주는 조항입니다.

강남콩이 아니라 강낭콩인 까닭

가장 자주 드는 예가 강낭콩입니다. 강낭콩은 본래 중국 강남 지방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됩니다. 그래서 어원을 따지면 강남콩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학생들도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럼 강남콩이 맞는 것 같은데요?”라는 반응이 나옵니다.

그런데 말은 책상 위에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 입에서 수없이 오가며 소리가 편한 쪽으로 바뀌고, 바뀐 소리가 다시 표기로 굳기도 합니다. 강남콩의 ‘남’이 실제 언중의 발음과 사용 속에서 ‘낭’으로 굳어졌고, 사람들이 더 이상 강남이라는 지명을 또렷하게 떠올리지 않게 되면서 강낭콩이 표준어가 된 것입니다.

이때 강남콩은 단순히 틀린 말이라기보다, 어원 쪽으로 되돌려 생각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표준어 규정에서는 현재 표준으로 강낭콩을 택합니다. 말의 역사와 현재 쓰임이 부딪힐 때, 제5항은 현재의 굳은 쓰임에 손을 들어 주는 셈입니다.

사글세와 삭월세도 같은 원리입니다

사글세도 많이 헷갈립니다. 예전에는 일정한 기간의 집세를 한꺼번에 내고, 거기서 달마다 얼마씩 제하는 방식의 셋돈을 가리켜 사글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배경을 한자로 억지로 떠올리면 삭월세가 더 맞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달마다 깎아 나간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표준어는 사글세입니다. 표준어 규정 제5항의 예에도 사글세가 들어갑니다. 삭월세가 더 점잖아 보이고 한자어처럼 보여서 맞다고 느끼는 분도 있지만, 실제 표준어 판단에서는 그런 인상이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사글세라는 형태가 널리 굳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조심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월세라는 말 자체는 표준어입니다. 그러니까 사글세가 표준어라고 해서 월세를 버리는 말로 보면 안 됩니다. 사글세와 월세는 생활 속에서 가리키는 방식과 쓰임이 다릅니다. 제5항은 ‘사글세냐 삭월세냐’처럼 같은 자리를 두고 겨루는 형태에서 어느 쪽을 표준으로 삼을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고삿과 울력성당은 낯설지만 규정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표준어 규정 제5항에는 강낭콩, 고삿, 사글세, 울력성당 같은 예가 제시됩니다. 요즘 일상에서 고삿이나 울력성당을 자주 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 예를 들면 오히려 강낭콩과 사글세 쪽이 훨씬 잘 와닿습니다.

고삿은 집의 안팎이나 마을의 좁은 길과 관련해 쓰이는 말입니다. 어원에 가까운 고샅보다 고삿이 표준어로 잡혀 있습니다. 울력성당은 여러 사람이 떼를 지어 으르고 협박하는 일을 뜻합니다. 위력성당처럼 한자 뜻을 또렷하게 살린 형태가 더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규정은 울력성당을 표준어로 삼습니다.

이 예들을 한 줄로 외우면 금방 잊습니다. 강낭콩, 고삿, 사글세, 울력성당. 이렇게만 외우면 시험 전날에는 기억나도 며칠 뒤에는 흐려집니다. 반대로 “어원보다 굳어진 실제 쓰임을 보는 조항”이라고 이해하면 처음 보는 단어를 만나도 판단의 방향이 생깁니다.

어원이 늘 표준어를 이기지는 않습니다

맞춤법과 표준어를 공부할 때 많은 분이 어원을 매우 강한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어원은 중요합니다. 말의 뿌리를 알면 왜 그렇게 쓰는지 선명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며칠’이 ‘몇 일’이 아닌 이유, ‘설거지’가 ‘설겆이’가 아닌 이유도 역사와 형태를 알아야 오래 기억됩니다.

그런데 표준어 규정 제5항은 어원이 언제나 마지막 판단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언중이 이미 다른 형태를 오래 쓰고 있고, 그 형태가 사회적으로 굳었다면 표준어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표준어는 박물관에 보관된 옛말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통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낭콩을 볼 때는 “강남에서 왔으니 강남콩이 맞을 텐데”에서 멈추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가야 합니다. 이 말이 지금 사람들 입에서 어떤 모양으로 굳었는가. 그 굳어진 모양을 표준어 규정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이 순서로 보면 규정이 꽤 현실적인 장치라는 점이 보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표준어를 외울 때 꼭 반대말처럼 붙여 보라고 말합니다. 강낭콩은 표준어, 강남콩은 표준어가 아닙니다. 사글세는 표준어, 삭월세는 표준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유를 하나 붙입니다. 어원 쪽이 그럴듯해도 이미 굳어진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요. 이 한 문장이 붙으면 단순 암기가 아니라 이해가 됩니다.

말은 사람들이 쓰면서 조금씩 닳고, 붙고, 바뀝니다. 국어 규정은 그 변화를 무조건 막기만 하는 울타리가 아닙니다. 때로는 오래 굳은 변화를 표준어 안으로 들여옵니다. 표준어 규정 제5항을 알고 나면 강낭콩 하나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틀린 표기를 찾는 눈보다, 말이 살아온 길을 보는 눈이 먼저 생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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