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순 우리말 모음 어떤 말부터 담을까요?

얼마 전 학생이 강물 사진을 보여 주며 “빛이 잘게 부서지는 걸 뭐라고 쓰면 좋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반짝이는 물’도 틀리지 않지만, 그 장면에는 ‘윤슬’이 더 잘 어울렸습니다. 학생은 뜻을 듣고 사진을 다시 보더니 곧바로 그 말을 기억하더군요.
예쁜 순 우리말 모음을 찾을 때 소리만 고르면 금세 잊기 쉽습니다. 말이 가리키는 장면과 쓰임을 함께 알아야 내 문장에도 자연스럽게 들어옵니다. 여기서는 빛과 날씨, 계절, 사람 사이의 마음을 담은 말들을 골랐습니다.
빛과 날씨가 남긴 말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입니다. 물 위에 빛이 길게 비친다고 해서 그 빛줄기 전체를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강가에 앉아 윤슬을 바라보았다”라고 쓰면 물결의 움직임까지 떠오릅니다. 제가 학생에게 이 말을 권한 것도 사진 속에 작은 물결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우비는 햇빛이 비치는데 내리는 비입니다. “운동장에 여우비가 내려 아이들이 하늘을 올려다봤다”처럼 쓰면 맑은 하늘과 빗방울이 함께 그려지지요. 이름이 재미있다고 해서 여우와 비에 얽힌 이야기를 확실한 어원처럼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뜻을 알 때는 실제 날씨 장면을 먼저 떠올리는 편이 정확합니다.
노을은 해가 뜨거나 질 무렵 하늘에 퍼지는 붉은빛입니다. 흔히 저녁 풍경에만 붙이지만 아침에도 노을이 있습니다. “퇴근길 노을”은 익숙하고, “이른 아침 노을”은 조금 낯설어도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익숙한 말일수록 뜻의 범위를 좁혀 기억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미리내도 아름다운 말로 자주 꼽힙니다. 다만 우리말샘에서는 ‘은하수’를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풀이합니다. 어느 지역에서 쓰인 말인지 함께 알고 소개하면 그 말의 자리가 더 또렷해집니다. 사전에 오른 방언을 만났다고 해서 아름다움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계절의 움직임을 담은 말
꽃샘추위는 이른 봄, 꽃이 필 때쯤 찾아오는 추위입니다. 꽃이 피려는데 추위가 시샘이라도 하는 듯하다는 말의 짜임이 재미있습니다. “벚꽃이 핀 뒤 꽃샘추위가 왔다”는 문장에는 따뜻해진 줄 알고 얇은 옷을 꺼냈다가 다시 외투를 찾는 경험이 묻어납니다.
아람은 아람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를 이릅니다. 막연히 ‘아름다운 열매’라는 뜻으로 풀면 원래의 쓰임에서 멀어집니다. “밤이 아람이 벌어질 때를 기다렸다”처럼 익어 가는 때를 떠올리면 기억하기 쉽습니다. 짧은 두 음절 안에 가을의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가랑비는 조금씩 가늘게 내리는 비입니다. 여우비가 햇빛과 비가 함께 있는 장면을 가리킨다면, 가랑비는 빗줄기의 굵기와 내리는 모양에 눈길을 둡니다. “가랑비에 책가방이 젖었다”라고 쓰면 거센 소나기와는 다른 하루가 보입니다. 비를 부르는 말이 여러 개인 까닭도 이렇게 보고 느낀 모습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사람 사이에서 빛나는 말
다솜은 애틋하게 사랑함이라는 뜻입니다. 국립국어원 설명에 따르면 옛말 ‘오다’의 명사형을 현대 국어식으로 적은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으로 쓸 때의 다정한 느낌과 별개로, 처음부터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뜻의 형용사였다고 설명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말이 예쁠수록 본래의 뜻도 함께 챙겨 주고 싶습니다.
살갑다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고 정답다는 뜻으로 많이 씁니다. “처음 만난 학생에게도 살갑게 말을 건넸다”라고 하면 단순히 친절했다는 말보다 상대를 편하게 해 준 태도가 잘 드러납니다. ‘살가운 인사’처럼 가까운 사람의 온기를 전할 때도 어울립니다.
도란도란은 여러 사람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을 나타냅니다. “식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했다”라는 문장에는 목소리의 크기뿐 아니라 함께 있는 분위기도 담깁니다. 아이들에게 뜻을 설명할 때는 조용히 이야기하는 모습만 보여 주기보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웃는 장면을 들려주면 오래 남았습니다.
마중도 곱씹을 만합니다. 오는 사람을 나가서 맞이하는 일이지요. “역으로 할머니 마중을 갔다”라고 하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과 몸을 움직여 맞으러 가는 행동이 함께 보입니다. 특별한 행사에 붙이지 않아도 일상에서 충분히 빛나는 말입니다.
예쁜 말일수록 뜻과 쓰임을 함께
순우리말은 한자어나 외래어가 아닌 고유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인터넷의 목록에는 오래 쓰인 말, 지역에서 쓰인 말, 옛말을 현대식으로 적은 말, 새로 만든 이름이 한 줄에 섞이기도 합니다. 모두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면 읽는 사람이 실제 쓰임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가령 미리내를 소개할 때는 제주 방언이라는 정보를, 다솜을 소개할 때는 옛말에서 온 표기라는 정보를 곁들이는 식입니다. 반대로 새로 만든 말이라면 새로 만든 말이라고 밝혀도 좋습니다. 새말이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오래전부터 널리 쓰인 말인 것처럼 꾸밀 이유도 없습니다.
제가 교실에서 권하는 방법은 마음에 드는 말을 세 개만 골라 각각 한 문장씩 써 보는 것입니다. 윤슬은 물가에서, 아람은 가을 열매를 말할 때, 마중은 누군가를 맞으러 나설 때 써 보지요. 소리의 아름다움에 장면이 붙으면 그 말은 목록 속 낱말로만 남지 않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풍경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내 말이 됩니다.
